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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웹서비스기획자의 일상

출근은 무대에 오르는 일이다, 문제는 요즘 회사는 “일”보다 “연기”에 더 높은 연봉을 주는 척한다는 것이다.

by 심리인 2026.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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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자연인에서 직장인으로 변신한다. 표정은 ‘괜찮은 척’, 말투는 ‘논리적인 척’, 태도는 ‘프로페셔널한 척’. 이건 가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기술이고, 직업윤리에 가깝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전면 무대(front stage)와 후면 무대(back stage)를 오가며 역할을 수행한다는 비유가 있다.​

동료와 클라이언트는 내 감정의 관객이 아니다. 그들이 보고 싶은 건 내 내면의 고백이 아니라, 내가 “기능(function)”을 수행해서 “결과(result)”를 내는 장면이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 월급을 받는 사람의 계약서 같은 거다. 이런 감정 관리가 직무의 일부가 되는 상황은 ‘감정노동(emotional labor)’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아를리 호크실드가 감정노동을 임금을 받는 조건으로 감정을 관리하고 표정·태도를 연출하는 일로 정의했다는 설명이 널리 인용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진짜 지옥이다. 출근이 공연인 건 맞는데, 요즘 회사는 공연의 “내용”보다 “자막”에 집착한다. 특히 서비스 기획판은 용어 인플레이션이 기본 옵션이다. 어제는 화면 정의서였던 게 오늘은 PRD가 되고, 기획 문서는 “Product Narrative”가 되고, 회의는 “싱크(sync)”가 되고, 일단 영어로 바르면 뭔가 더 고급져 보인다. 근데 그 고급짐이 고객 가치로 연결되냐고? 대부분은 연결되지 않는다. 용어는 늘어나는데, 제품은 그대로고, 책임은 더 흐려진다.

나는 중간규모 회사에서 2년 버티고, 중견기업 계열사에서 6년을 더 버텼다. 총 7년 동안 깨달은 건 단 하나다. 회사가 원하는 건 ‘유능함’이 아니라, 유능해 보이는 연출과 그 연출을 지지해줄 아군의 숫자다. 그래서 나는 5 연속 진급 누락을 했다. 실력이 부족했냐고 물으면, 솔직히 반은 맞다. 근데 나머지 반은 정치력과 사회성의 부족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쓸모”가 아니라 “편”이 되지 못했다.

기획자는 산출물로 말한다는 환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의 산출물은 ‘신뢰’를 만들지 못하면 종이쪼가리다. 나는 파편화된 스토리보드로 신뢰를 잃어봤고, 이메이전트(Imagination) 기획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로 책임을 희석하는 문화를 옆에서 봤다. “이건 컨셉이에요”, “디테일은 개발하면서 맞춰요”, “일단 방향성만 잡죠” 같은 말들이 쌓이면 결과는 하나다. 일정은 터지고, 화면은 뒤집히고, 마지막엔 기획이 욕받이가 된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건,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획자의 문서를 읽지 않는다. 읽지 않는 문서는 곧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이다.

그때부터 개발자에게 휘둘리기 시작한다. “이건 기술적으로 어려워요” 한 마디면 기획의 절반이 증발하고, “그럼 이렇게 타협하죠”라는 말이 합리적인 척하면서 제품을 망친다. 물론 개발자가 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내가 제품의 중심이 아니라, 조율 실패의 책임자로 서서히 밀려났다는 거다. 부서 안에서는 비주류가 됐고, 기획자들 사이에서는 뒷담화와 따돌림의 소재가 됐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꼿꼿해?’가 아니라, ‘저 사람은 왜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해?’가 되는 순간, 무대 위에서 나는 배우가 아니라 소품이 된다.

그럼에도 회사는 내게 “리더십”, “오너십(ownership)”, “임팩트(impact)”를 요구한다. 근데 웃기지 않나. 권한은 없는데 오너십을 내놓으래. 결정권은 위에 있는데 임팩트를 내놓으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최고의 회사어는 이것이다. “얼라인(alignment)”. 얼라인은 좋은 단어다. 다만 현실에서는 ‘반대하지 말고 맞춰’의 고급 포장지로 더 자주 쓰인다.

나도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블로그, 유튜브, 개인 브랜딩. 요즘 시대에 그거 안 하면 뒤처진다길래 해봤다. 결과는 처참했다. 꾸준함이 실력이라는데, 꾸준함을 유지할 체력은 회사가 먼저 갈아먹었다. 조회수는 내 자존심을 갉아먹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만 남기고 싶지 않아서 더 말을 아꼈다. 결국 남는 건 한 문장이다. “현실의 한계 상실감.” 회사에서 인정 못 받고, 밖에서도 시장 검증을 못 받으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연봉 4,500만 원. 중견기업이라는 얇은 울타리. 밖에서 보면 그럴듯하다. 안에서 보면 고립이다. 퇴사 버튼을 누르기에는 애매하게 현실적이고, 버티기에는 너무 모욕적인 상태. 딱 그 중간, 사람들이 제일 오래 썩는 온도에서 나는 7년을 살았다.

그래서 다시, 출근은 공연이라는 문장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건 “웃어라”가 아니다. 무대 위에서 울지 말라는 것도, 감정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무대 위에서 해야 할 연기는, 회사가 좋아하는 용어가 아니라 고객이 체감하는 가치여야 한다. 말의 인플레이션이 심할수록, 진짜 실력은 더 촌스럽고 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누구나 PRD를 쓰지만, 아무나 ‘결정 가능한 문서’를 만들진 못한다. 누구나 데이터 드리븐을 외치지만, 아무나 다음 액션을 못 박진 못한다.

그리고 그게 어렵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무대 뒤에서 우는 건 자유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우는 순간, 관객은 감동하지 않는다. “프로답지 않다”는 판결만 남는다. 고프먼의 비유처럼 전면 무대는 관객을 설득하는 공간이고, 후면 무대는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문제는 많은 직장인이 후면 무대 없이 전면 무대만 강요받는다는 점이고, 그때 사람은 결국 표정부터 망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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