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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웹서비스기획자의 일상

자동화 기능 하나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

by 심리인 202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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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콘텐츠 플랫폼의 ' NGM-Fill' 개선 대화를 끝까지 읽다 보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불필요한 공손함과 "조속한 수정 요청"만이 무한 반복된다. 기능 하나에 이토록 많은 감정과 자존심이 얽힐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훌륭한 블랙코미디다.

1. "긴급"을 외치는 사람들

대화는 '긴급', '즉시 보완'으로 가득하다. 정말로 불안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이걸 얼마나 심각하게 보는지"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이 기능은 서비스 생존을 가름짓는다"는 문장은 운영 리스크가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메신저 창은 '리스크 관리'가 아니라 '평판 관리'의 전장이 된다.

2. 기획자 갑 – 방패막이의 심리

"기획 2팀 갑입니다"로 시작하는 그는 단 한 번도 "이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윗선의 요구를 정리하고 전달하는 게 전부다. 그의 공손함은 미덕이 아니라 방패다. 양쪽 칼날을 동시에 막으면서도 누구의 편도 아닌 척하는 사람. 프로젝트 말미에 그가 "배포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의 삶에서 '종료'는 '번아웃'의 형태로 찾아온다.

3. 운영 팀장 을 – 통제 불능을 시스템에 투영하는 사람

"크리에이터가 중독(?)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은 현장에 대한 불안의 고백이다. 현장은 통제할 수 없으니,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시스템 로직'에 모든 걸 몰아붙인다. "작성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툴이 저렇게 보이면 안 됩니다"라는 명령형으로 변환된다. 그가 휘두른 검은 누군가의 야근 기록으로 남는다.

4. 개발 팀장 병 – "죄송합니다"로 살아남는 사람

"죄송합니다"에 중독된 그는 정면 반박 대신 일정과 난이도를 늘려 자연사시킨다. "그건 두 달짜리 일입니다"라는 진실 대신,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조직에서 "안 됩니다"보다 안전한 말은 "조금 더 테스트하겠습니다"다. 그의 방어적 태도는 이미 마음속에서 프로젝트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5. 이사 정 – 알고리즘에 존재를 건 사람

"이 기능은 서비스 생존을 가름짓는다"는 그의 선언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존재 증명 프로젝트'다. 회사의 위기감, 통제 불가능한 콘텐츠 물량, 인력 부족. 이 모든 게 하나의 기능에 투사된다. 그는 알고리즘 세부까지 직접 관여한다. "중독(?)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게 아니라 이사의 불안을 달래는 말이다.

6. 조직의 집단 심리 – 사용자가 사라진 회의

가장 기묘한 건 아무도 실제 크리에이터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성자가 의심할 수 있다"는 걱정은 있어도, 정작 작성자와 대화한 흔적은 없다. 모두가 '사용자'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향해 말한다. 이사는 임원진에게, 팀장은 이사에게, 기획자는 양쪽에게, 개발자는 모두에게 동시에 말하면서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7. 반면교사 – 이렇게 일하면 팀이 죽는다

이 기록은 각자의 심리 메커니즘이 만드는 덫을 보여준다.

기획자 갑: "나는 조율자니까 누구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
운영 팀장 을: "나는 현장을 지켜야 하니 시스템을 끝없이 괴롭혀야 한다."
개발팀장 병: "나는 책임지되 부딪히지 않아야 하니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시간을 늘린다."
이사 정: "나는 비전을 증명해야 하니 기능 하나에 세계를 건다."

이 구조에선 문제가 해결되어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기능이 배포되어도 또 다른 개선 요청이고, 생산성이 올라가도 곧바로 '더 높은 목표'가 된다. 야근을 견딘 사람에게 돌아오는 건 보상이 아니라 "다음 기능도 부탁드립니다"다.

8. 불편한 조언 – 문장을 바꾸는 용기

이 기록을 읽으며 웃음이 났다면, 이 질문이 따라와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가장 가깝나?"

생각보다 간단한 선택지가 있다.

'공손함'을 방패로 쓰지 말 것. "문의드립니다"로 자신을 지우지 말고, "이 부분은 리스크가 크다"고 기록에 남길 것.

'긴급'에 중독되지 말 것. 정말 긴급하다면 불만이 아니라 책임이 먼저 나와야 한다.

'죄송합니다' 대신 '이건 안 됩니다'를 연습할 것. "그건 두 달짜리 일입니다"라는 한 줄이 조직을 살릴 때가 있다.

기능 하나에 존재 증명을 걸지 말 것. 당신의 가치는 기능의 성패가 아니라 과정을 통과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실제 사용자의 얼굴을 떠올릴 것. 그들의 하루를 상상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KPI만을 위해 일하게 된다.

"조속한 수정 요청드립니다" 대신 이렇게 써 보자. "이 요구는 지금 상태에서 구현하면 팀이 무너집니다. 우선순위를 다시 논의하고 싶습니다." 그 문장을 쓸 용기가 생기는 날, 당신은 이 블랙코미디의 관객 자리에서 무대 밖으로 한 발자국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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