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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날 부서장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 서비스는 누가 어떻게 쓰는지 이 문서부터 읽어보세요." 그것이 전부였다. 며칠 동안 나는 맡은 업무 없이 그 문서만 보았다.
사주로 천간지지를 익히던 때처럼 낯선 용어들을 암기하듯 외웠다. '최적화 알고리즘' '매칭 로직' 'CS 트랜잭션'. 그때는 단지 "내가 뽑힌 사람이 맞나" 하는 의문뿐이었다.
그 의문은 수 년 후 퇴사할 때쯤에야 해답을 얻었다. 어느 날 저녁식사에서 내 부서장이 입을 열었다. "서비스기획자로 뽑을 때 원래 1순위가 아니었어요. 2순위였죠." 그가 말했다.
"당신이 최종합격 이후로 3주간 시간을 달라고 했잖아요. 다른 대기업 면접 본다면서. 나는 그런 사람 필요 없다고 3순위에게 연락하라고 했는데 인사팀에서 그냥 당신을 붙들어뒀죠."
나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입사 전 마지막 불씨를 지피며 본 면접 그리고 이어진 탈락. 인사담당자는 그 3주를 '최종확정'으로 부서장은 '임시보류'로 본 셈이었다.
조직이라는 게 사주 팔자처럼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선택과 반대가 얽힌 결과였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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