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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웹서비스기획자의 일상

버튼 하나 추가하기 그리고 경멸의 시선

by 심리인 202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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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입니다"가 아니라 "요청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첫 업무는 어드민 메뉴에 버튼 하나 추가하는 것이었다. 파워포인트에 네모 박스에 텍스트만 넣어서 개발자에게 넘겼다. 
'기획'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스스로 '요청'이라 낮췄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겸손함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방어였다.
개발자는 경력 5년 차였다. 내가 세부 설명을 빼먹어도 알아서 다 만들어주었다. 관계의 신뢰를 얻은 줄 알았다. "이 개발자분은 나를 챙겨주시는구나." 하지만 그는 단지 내가 시킨 대로만 하기 싫어서 알아서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오해했다. 테스트는 간단했다. 버튼을 누르니 팝업이 뜨고 저장이 되었다. 끝. 배포 요청을 했고 개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CS부서에서 연락이 왔다. 버튼을 누르니 기존 데이터가 사라진단다. 나는 개발자에게 물었다. "그런 경우는 생각 못 했는데요?" 개발자는 대답했다. "기획서에 없었잖아요." 그날부터 무한 수정이 시작됐다. 
예외 케이스 하나 추가하면 또 다른 예외가 생겼다. 매번 수정할 때마다 부서장은 물었다. "왜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알아보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백오피스에서 기능 하나 수정한다면 파악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사용자 등록부터 권한 관리 로그 배치 연동까지. 하지만 그걸 다 파악하면 배포일을 못 맞췄다. 그래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처리했다. 
당장 욕 먹지 않으면 그만인 거고 사고만 안 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사고가 났다. 욕도 먹었다. 그리고 상급자들은 나를 '일 하나 맡기면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무한 수정한 건 기획서가 아니었다. 내 사주 팔자였다. 한 번에 제대로 보지 않으니 운명이 계속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 시점에 내가 기억은 안나지만 누군가에게 물었다. "왜 처음에 가이드를 안 주셨어요?" 그가 대답했다. "기획자는 알아서 해야죠. 그게 기획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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